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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을 직접 읽어봐야겠다.
이후로는 계속 가슴이 답답한 상태라,
희곡을 직접 읽어봐야겠다.
연기가 문제니 무대가 문제니 하는 말들이 많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먹먹하고 답답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한 것인지, 나만 이따위인지 모르겠지만
체홉 당신, 너무 후려 치시는 거 아니오.
따끔거리고 쓰라려서 혼났수.
배배 꼬인 지랄 맞은 영감탱이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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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이 좋은 것도 있다. poverty has a val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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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수재민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수재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개발되지 않은 동네의 땅을 10평씩 나눠준 적이 있었나보다.
그것이 홍수로 인한 것인지, 댐 건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이 10평의 좁은 땅을 나눠 받아 살던 동네.
그래서 조밀조밀하게 집들이 붙어 있고, 골목은 개미골목마냥 좁고 꼬불꼬불한 동네였다.
게다가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우리 집은 수재를 입을 당시 집주인이 아니라, 세를 살고 있던 터라
그나마 나눠주는 10평의 땅덩이도 받지 못한 채, 살 곳을 잃어 당시 집주인을 따라 이 동네로 흘러오신 거라고.
그러면서 이 집, 저 집을 떠돌아 다니듯 생활하다 집을 장만하게 되신 어머니와 아버지는,
유난히도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다. 집안에 화장실마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그 작은 집.
그런 작고 후지고 가난한 동네에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워낙에 골목도 좁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항상 동네 사람들은 모여 있기를 좋아했다.
여름밤이면 평상을 펼쳐놓고 이웃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든지,
수박을 나눠 먹는다든지, 윷놀이나 고스톱, 동전던지기를 한다든지 하는 풍경은 내게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해도 커다란 냄비에 한 솥 가득하셔서는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나눠 먹기를 좋아하시던 어머니.
떡을 해도 많지는 않지만 넉넉하게 해서 꼭 조금씩은 나눠 먹으려 하셨던 어머니.
김장을 하실 때도 어머니는 꼭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좁은 방안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깔깔깔, 웃기도 하고 갓 속넣은 김치를 내 입에 한 입씩 넣어주기도 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좋은 일이 있을 때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꼭 하셨던 일이 있는데,
바로 카스테라 굽기.
나름 부잣집 딸이었던 어머니는, 몰래 집에서 도망나와 아버지와 결혼한 것이어서
혼수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나중에 혼수라고 생각하고 구입하신-혹은 그렇게 기억되는-
이 옅은 갈색에 우주선 모양처럼 생긴 커--다란 골드스타표 제빵기는 집안의 보물 1호였다.
어머니가 카스테라를 굽는 날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조금씩 달걀이나 밀가루, 버터 등을
가지고 나와 둥그렇게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카스테라를 구우시고,
동네 꼬마들은-나를 포함한- 집 앞 평상에 앉아 카스테라가 다 구워지기만을 기다렸다.
그 날은, 온 동네가 구수한 빵냄새로 가득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입에 카스테라를 물고 있는 날이었다.
그 제빵기라는 것이 크기도 엄청나게 크고, 깊이도 꽤 깊었던 터라 한 번 구워내면 꽤 많은 양의
카스테라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이 흘러서,
누이와 나는 다락방에 쳐박혀서 먼지가 고스란히 쌓인 제빵기를 발견했다.
아직 국민학생인 나와,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누이는 제빵기를 꺼내고 옆에 고이 접혀 있던
설명서를 꺼내서 카스테라를 구워보기로 했다.
누이와 나에게 그 카스테라는 단순한 빵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으니까.
그런데 왠걸- 설명서대로 그대로 따라 만든 그 카스테라는,
바닥은 눅눅하고 표면은 살짝 타버려서, 어머니가 만든 카스테라와는 전혀 다르더라.
어머니가 시켰던 그대로 계란에 하얀 거품도 내고, 제빵지 대신 사용하던 신문지도 깔았는데도
절대 어머니처럼 만들 수는 없더라.
아니, 설사 근사한 카스테라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절대 그 맛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는 설익고 위는 타버린 그 카스테라를 먹으면서 눈물이 어찌나 나던지.
지금의 어릴 적 우리 동네는, 다들 집을 3층씩 4층씩 올리고, 혹은 이사를 가고.
더 이상 저녁에 모여 앉아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가 없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된 그 시절 아저씨 아주머니 몇 분이 반갑게 반겨주시고
서로 작은 구멍가게 앞 평상에 모여 앉아 맥주며 막걸리를 드시고 계실 뿐.
가난하다는 것이, 그저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집을 3층 4층 올릴 여력이 된다는 것이 그저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높게 올라간 집들이, 내게는 굳은 벽으로만 보이더라.
덧. http://xirupark.egloos.com/1275495 -지루박 베이커리 를 읽고 생각이 나버렸습니다.
덧2. 쓰다보니 되게 길어졌네요. 하핫;
덧3. 사실 골드스타였는지도 가물가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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